본문 바로가기
ART

고양이 그림에 탁월한 재능을 가진 스위스 화가 고트프리트 마인드

by 아이디어박람회 2025. 1. 20.
반응형

혹시 스위스 출신의 화가, 고트프리트 마인드를 아는지 모르겠다. 사실 국내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고, 한국어판 위키백과조차 없는 실정이라, 그의 이름을 들으면 “누구지?”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그는 한때 ‘고양이 그림의 거장’으로 유럽 전역에서 불릴 정도로 대단한 화가였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바로 ‘고양이의 라파엘로’다.

 

고트프리드 마인드(Gottfried Mind)의 자화상을 바탕으로 요한 하인리히 립스가 제작한 석판화, 1816년

 

고양이 한 마리를 그리더라도 털 한 올 한 올까지 신경 쓴 듯 섬세하게 표현했고, 자연스러운 동작 묘사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런 천부적인 재능 뒤에는, 흔히 ‘서번트 증후군’이라 불리는 특성과 외로운 삶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은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예술가로서 자신의 흔적을 남겼는지 천천히 살펴보려 한다.

 

허약체질 소년, 그림에 눈뜨다

 

1768년 스위스 베른에서 태어난 고트프리트 마인드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헝가리에서 온 이주민으로 제지 공장에서 일했다는 것 외엔, 그의 가족사에 대해 알려진 정보가 거의 없는 편이다. 어린 시절 정규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미술이나 조각 같은 예술 분야에는 유난히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고트프리드 마인드의 수채화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 1800년경

 

 

그가 7살쯤 되었을 때, 주변에서 “저 아이를 산업 노동 학교에 보내보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이 학교는 방적, 직조, 염색처럼 손과 몸을 쓰는 기술을 가르치며, 가난한 아이들에게 일종의 생계를 위한 교육을 제공하던 곳이었다. 마인드는 이곳에서 기본적인 읽기 쓰기를 조금 배웠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육체노동에 쓰였던 모양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보여준 천진난만하면서도 기발한 장난기, 그리고 재능에 가까운 감각이 선생님들을 깜짝 놀라게 했다. 누군가는 “저 녀석, 그림 쪽으로 키우면 대성할지도 몰라”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덴베르거의 ‘별난 조수’

 

14살 안팎이 되었을 때, 마인드는 화가이자 판화가였던 지크문트 프로이덴베르거 집에 들어가 살며 채색 에칭 같은 작업을 배웠다. 프로이덴베르거는 원래 프랑스 파리에서 로코코 풍의 삽화나 그림을 그리던 예술가로, 나중에 고향 베른으로 돌아와 농민의 일상 같은 소재를 주로 다뤘다고 한다.

 

고트프리드 마인드의 수채화 '고양이와 새끼 고양이들'

 

당시 프로이덴베르거는 다락방에 기거하던 어린 마인드에게, 자기 작품에 마지막 색을 입히거나 세부를 손질하는 일을 맡겼다. 마인드의 재능을 그만큼 높게 평가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데 정작 마을 사람들은 마인드의 ‘이상한’ 옷차림이나 엉뚱한 행동을 보고 별종 취급을 하기도 했다. 몸이 약한 데다 말투도 분명하지 않았고, 뭔가 땅만 바라보며 혼자 속삭이는 일이 잦았다는 식의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트프리드 마인드의 수채화를 바탕으로 한 요제프 브로트만의 리토그래프, 1820~60년경

 

 

그러나 마인드가 그림만큼은 남다른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보는 눈은 분명 존재했다.

 

고양이 한 마리에 담긴 재능

 

시간이 흘러 프로이덴베르거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의 부인은 마인드를 계속 집에 머물게 했다. 덕분에 마인드는 어쩌면 평생의 숙원일지도 모르는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을 마음껏 그릴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사람들이 특히 열광한 소재가 바로 ‘고양이’였다.

 

고트프리드 마인드 '쥐가 들끓는 침실에서 사냥하는 고양이' 1783~1814년경

 

 

당시 마인드가 그린 고양이를 보고, “저렇게까지 털의 질감과 몸짓을 사실적으로 표현해내다니 대단한데?” 하는 반응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고양이의 앉아 있는 모습, 하품하는 순간, 몸을 구부리고 털을 핥는 장면 등 자연스러운 동작들을 촘촘하게 묘사했는데, 이게 상당히 정교하고 생동감 있었다는 것이다.

 

마인드 수채화를 바탕으로 한 샹플뢰리의 저서 삽화

 

결국 그의 재능이 유럽 곳곳에서 소문나기 시작했고, 사람들이 르네상스 거장 ‘라파엘로’의 이름을 빌려 “저이는 고양이로 치면 라파엘로급 화가!”라는 칭호까지 붙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건 마인드가 유명해졌어도, 정작 그의 일상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는 점이다. 1814년 46세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주변에서 ‘특별하지만 어딘가 어색한 예술가’로 여겨지곤 했다.

 

하지만 그가 남긴 고양이 그림들만큼은 워낙 돋보여서, 역사가 흐른 뒤에도 예술가나 수집가들 사이에서 가치를 인정받았다고 한다.

 

‘크레틴증’과 알프스의 이미지

 

19세기 초 유럽은 예술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던 시기였다. 동시에 인간과 동물의 관계에 대한 관심도 커졌고, 스위스 알프스에 대한 막연한 동경도 퍼져나갔다. 그런데 이 알프스 지역에는 ‘크레틴증(선천성 갑상샘 기능저하증)’이 많다는 통념이 있었다.

 

고트프리드 마인드의 새끼 고양이와 먹이, 1800년경

 

 

영양이 부족한 산악 지대 특유의 문제로, 지적장애나 발달 지연을 일으킬 가능성이 높다는 식이었다. 마인드 역시 어려서부터 허약했고, 말과 글에 능숙하지 못했기에 사람들이 “그는 크레틴증이었을지도 몰라”라고 짐작했다. 한동안 그의 이야기는 “몸이 부실하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고양이만큼은 기막히게 그리는 괴짜 예술가”로 요약되곤 했다.

 

후대에 와서는 이런 모습이 서번트 증후군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특정 분야, 가령 그림이나 음악에서 천재적인 능력을 보이지만, 전반적인 인지 능력은 낮은 경우가 있다는 것이다.

 

역경 속에서도 찾아온 좋은 인연

 

하지만 마인드가 이처럼 예술가로 꽃필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우연인지 필연인지, 꽤나 운이 좋은 만남들이 있었다. 가령 그의 아버지가 근무하던 제지 공장의 고용주, 그루너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루너는 예술 애호가이자 후원자로서, 영국의 유명 화가 J.M.W. 터너에게 스케치북을 판 일화로도 알려져 있다.

 

고트프리드 마인드(Gottfried Mind)의 유럽 불곰 수채화, 1800년경

 

 

마인드는 그루너의 집에 머물던 독일 화가 레겔에게 그림 기초를 배우며, 다양한 회화와 판화를 직접 보고 공부할 기회를 얻었다. 또, 스위스 베른을 무대로 활동하던 지그문트 바그너의 컬렉션도 연구하면서 예술적 시야를 넓혔다. 이러한 경험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마인드만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관찰력으로 고양이뿐 아니라 곰 같은 동물도 자연스럽게 그려낼 수 있게 되었다.

 

동물 해부학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는데, 근육과 골격, 털의 방향 등을 거의 정확히 포착했다니 대단하지 않은가.

 

19세기의 ‘고양이 그림 열풍’과 다시 주목받은 마인드

 

사실 19세기 프랑스에서는 에두아르 마네 같은 예술가들이 고양이를 그리며 일종의 ‘고양이 붐’을 일으켰다. 아마 묘한 우아함과 신비함 때문에 예술가들에게 매력적인 소재로 여겨졌던 모양이다. 그 흐름 속에서 마인드가 그린 고양이 그림도 다시금 조명받았다. 예컨대 1868년, 마인드의 고양이 수채화가 프랑스 미술평론가 샹프릴리의 책 삽화로 쓰였고, 에두아르 마네의 포스터와 함께 홍보되기도 했다.

 

그때 사람들이 남긴 평가가 참 흥미롭다. “마인드의 고양이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식의 찬사가 이어졌다고 한다. 즉, 굳이 인간적인 상황이나 장식적 요소를 넣지 않아도, 고양이의 동작과 몸의 곡선이 주는 매력 자체가 충분히 예술이 된다는 것이다.

 

마인드가 남긴 질문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마인드는 분명 서번트 증후군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당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말이 불분명했고, 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다. 그럼에도 “천재적인 화가”라는 찬사가 뒤따랐다. 19세기 전반부터 이미 의사나 정신과 전문가들은 “이 사람은 보통과 다르다”면서 논문을 쓰거나 보고서를 남기기 시작했다.

 

1814~1818년경 고트프리드 마인드가 그린 자화상. 사후에 출판된 컬렉션의 표지로 컬러로 부활

 

그런데 이런 이야기가 반복될수록, 어쩐지 우리는 “사람을 함부로 분류하거나 단정 지을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하게 된다. 마인드에게는 분명 신체적 한계와 주변의 편견이 있었지만, 동시에 엄청난 예술적 재능도 함께 존재했다. 정신과 의사 윌리엄 W. 아일랜드가 “특별한 재능을 갖춘 사람은 일상적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도 흔하다”고 말했듯, 천재와 비일상성은 늘 종이 한 장 차이로 공존하는 법이니까 말이다.

 

예술로 기억되는 이름

 

마인드가 노상에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몸을 흔들고 있으면, 웬만한 사람들은 그를 이상하게 보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그의 시선 끝에는 어떤 고양이 한 마리가 있었을 수도 있고, 그 순간을 놓치지 않으려는 치열한 관찰이 있었을 수도 있다. 결국 우리는 그의 삶을 간단히 “괴짜였네”라고 몰아붙일 수 없다.

 

수십 년 뒤, 수백 년 뒤를 살고 있는 우리가 그의 이름을 ‘고양이 그림 대가’로 떠올릴 수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운명처럼 느껴진다. 설령 몸이 부실하고 세상을 향해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했어도, 그가 고양이를 그린 수많은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감탄을 자아낸다. 잘 알려지지 않은 화가이지만, 한 장의 고양이 그림이 우연히 어느 미술책에 실려 누군가의 눈길을 끌고, 또 그 사람이 친구에게 “스위스에 이런 화가가 있었대”라고 이야기해주는 순간이 온다면, 그걸로 이미 마인드의 이름은 현재진행형이 되지 않을까. 크레틴증이니 서번트 증후군이니 하는 딱지가 아닌, 예술가로서의 고트프리트 마인드로 기억되는 것. 그것이 어쩌면 그가 제일 원했던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VIA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