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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의 신부 연쇄 살인 사건, 보험금을 노린 치밀한 욕조 익사 살인 사건의 전말과 스미스의 충격적인 최후

by 아이디어박람회 2024. 10.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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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범죄 역사에 기록된 잔인한 연쇄 살인 사건이 1912년 7월, 영국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범인 남성은 신분을 숨기고 이름을 속여, 여러 여성과 결혼한 뒤(사실 중혼) 사고로 가장해 욕조에서 익사시켰다. 이 사건은 나중에 "욕조의 신부" 연쇄 살인 사건으로 불리게 된다. 그렇다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 보자.

 

 

| 가명을 사용해 결혼하고 아내를 집 욕조에서 익사시키다

 

 

 

그 남자의 이름은 조지 조셉 스미스였다. 하지만 헨리 윌리엄스라는 가명을 사용해 1910년에 베아트리스 맨디라는 여성과 결혼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12년 7월, 베아트리스 맨디는 집 욕조에서 익사했다. 그 죽음에는 범죄 혐의가 없다고 판단되어 사고사로 처리되었다.

 

그녀는 2,500파운드(당시 큰 금액)의 예금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본인의 유언에 따라 스미스는 그 돈을 고스란히 손에 넣었다.

 

| 결혼 후 아내를 욕조에서 익사시키고 보험금을 받아내다

 

1913년 11월, 스미스는 본명으로 결혼한 앨리스 버넘이 500파운드의 보험금을 가입한 후, 해변의 리조트 호텔 욕조에서 익사했다. 그러나 이것도 사고사로 판정되었다. 1914년 12월, 이번에는 존 로이드라는 가명을 사용해 스미스와 결혼한 마가렛 로프티가 마지막 희생자가 되었다. 마가렛도 역시 700파운드의 보험에 가입하고 결혼 직후 욕조에서 익사했다.

 

| 조지 조셉 스미스의 과거

 

조지 조셉 스미스는 1872년 1월 11일, 런던 베스널그린 지역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부터 문제아로, 소년원과 감옥을 드나들며 성장했다. 외모는 특별히 두드러지지 않았고, 무뚝뚝하며 다루기 어려운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여성들에게는 인기가 있었다.

 

1898년, 26세의 나이에 18세의 캐롤라인 손힐과 결혼했는데, 이때부터 이미 이름과 직업을 속여 손힐에게 가정부 일을 시키고 고용주 집에서 절도를 시켰다. 결국 손힐만 체포되었고, 스미스는 재빨리 모습을 감추었다. 두 사람은 이혼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후 결혼은 모두 불법 중혼이 되었다. 1908년 스미스는 에디스 페글러와 결혼했으나, 그녀는 살해되지 않았다.

 

| 셜록 홈즈 작가도 알아챈 사건 발각 경위

 

스미스의 범행이 드러나게 된 것은 두 번째 희생자 앨리스 버넘의 아버지 찰스가 신문에 실린 세 번째 희생자 마가렛 로프티의 사건을 알게 되면서였다. "딸의 죽음과 너무나도 유사하다. 이름은 다르지만 세 남편은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있다"며 신고했고, 이에 경찰 조직 스코틀랜드 야드가 수사에 착수했다.

 

셜록 홈즈의 창작자 아서 코난 도일도 남편이 수상하다는 것을 눈치챘고, 수사를 서두르라는 편지를 스코틀랜드 야드에 보냈다. 1915년 2월, 야드의 아서 닐 형사는 스미스가 로프티의 보험금을 수령하러 나타난 현장에서 그를 체포했다. 남은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으로 스미스가 죽은 여성들의 남편이라는 것이 분명해졌다.

 

그러나 스미스는 세 여성의 죽음은 완전히 우연이며, 자신은 불운했을 뿐이라 주장했다. 가명을 사용한 사실만 인정했을 뿐이다. 결혼 허가증에 가명을 쓴 죄로 기소할 수는 있었으나, 그가 연쇄 살인범이라는 것을 입증하려면 살인의 수법을 증명해야 했다.

 

| 어떻게 자연스러운 익사로 보이게 했을까?

 

닐 형사는 저명한 병리학자 버나드 스필즈베리 박사에게 수사 협력을 요청했다. 스필즈베리 박사는 법의학 조사의 형식을 바꿔놓을 '살인 가방'을 개발한 인물이다. 스필즈베리 박사는 세 여성의 시신을 발굴하여 저항의 흔적이 있는지 확인했으나, 목이나 손목에 타박상 등 두드러진 흔적은 없었다.

 

이 사실은 아내들이 건강 문제로 욕조에서 갑자기 죽었다는 스미스의 주장과 모순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들이 목욕 중 발작을 일으켜 사망했다면, 신체는 경직되고 머리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지 않고 수면 위에 남아 있어야 했다. 스필즈베리 박사는 스미스가 여성들의 발목을 잡고 갑작스럽게 당겨 머리를 물속에 가라앉혀 즉각적으로 익사시켰다는 결론을 내렸다.

 

이 방법이라면 여성들은 반사적으로 기절하여 저항할 틈도 없이 익사했을 것이라 예측했다. 이에 닐 형사는 여성 수영선수에게 협력을 요청해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물속에 가라앉히는 위험한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나 이 실험은 자칫 닐 형사가 살인을 저지를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 재판에서 유죄 판결, 사형이 집행되기까지

 

 

 

스미스의 재판은 1915년 6월, 중앙 형사 법원(올드 베일리)에서 시작되었다. 이는 엄밀히 말해 첫 희생자 베아트리스 맨디 사건에 관한 재판이었다. 변호 측은 여성들이 발을 헛디뎠거나, 머리를 감다가 갑자기 의식을 잃었거나, 간질 발작을 일으켰다며 사고로 죽은 것이라 주장했으나, 그들의 발언은 스필즈베리 박사에 의해 반박되었다.

 

베아트리스는 발견 당시 손에 비누를 쥐고 있었다. 의식을 잃고 천천히 익사했다면 비누는 손에서 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죽음이 찾아왔다면, 손 근육이 수축해 즉시 사후 경직으로 이어져 죽은 후에도 비누를 쥔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발작을 일으켜 죽었다면, 몸이 무너지는 두 번째, 세 번째 과정 중 어느 시점에든 비누는 손에서 떨어졌어야 했다고 스필즈베리 박사는 주장했다.

 

또한 박사는 스미스가 여성들의 발목을 잡아당겨 머리를 물속에 넣어 즉각적으로 살해한 논리를 설명했다. 피해자들은 남편이 단순히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며, 살해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스미스는 보험금에 대한 지식도 풍부해, 보험 사기로 인한 살인 혐의도 짙었다. 살해된 여성들은 모두 부유한 가정 출신이었으나, 1908년 결혼한 에디스 페글러는 죽음을 면한 것은 그녀가 하층계급 출신이어서 스미스에게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페글러의 증언은 생각할수록 섬뜩한 것이었다. 그녀는 스미스로부터 욕조 근처에서는 조심하라는 주의를 받은 적이 있다고 증언했다. "여성들은 욕조 근처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기절해 죽을 수도 있다"고 말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배심원들은 불과 20분 만에 스미스를 유죄로 평결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스미스는 메이드스톤 감옥에 보내져,

 

1915년 8월 13일 43세의 나이로 교수형에 처해질 때까지 몇 주를 보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울부짖었다고 전해진다. 스미스는 끝까지 범행을 자백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 여성들을 살해한 정확한 방법은 영원히 밝혀지지 않은 채 남게 되었다. 참고로 스미스는 베아트리스 맨디를 익사시킨 욕조를 반품해 대금을 돌려받았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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