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중에 상대방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어색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 그런데 단순히 “부끄러워서”라는 말로만 설명하기에는, 이 현상 뒤에 꽤 복잡한 이유가 숨어 있다고 한다. 2018년경에 발표된 교토대학교 연구 결과가 이를 잘 보여준다.
대화 중 눈을 맞추는 게 왜 어려울까?
교토대학교의 연구팀은 26명의 피험자를 대상으로 실험을 진행했다. 실험 방식은 단순했다. 컴퓨터로 만든 애니메이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나고, 그 얼굴과 눈을 마주친 상태에서 특정 단어에 관련된 다른 단어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나이프”라는 단어가 주어지면, “자르다”나 “찌르다” 같은 동사가 금방 생각나는 편이다. 이건 비교적 쉬운 연상이다.
그런데 “폴더”처럼 조금 더 추상적이거나 생각해야 할 여지가 많은 단어가 나오면 어떨까? 연구 결과, 피험자들은 이때 유독 시간이 오래 걸렸다고 한다. 연구팀은 “시선 맞추기”와 “단어 연상”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동안, 뇌가 두 작업에 필요한 인지 자원을 같은 곳에서 끌어다 써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간단한 단어면 괜찮지만, 어려운 단어일수록 시선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상대방 눈을 계속 바라보면서 생각까지 깊이 해야 하는 상황이 되면 뇌가 금세 과부하를 일으킬 수 있다는 뜻이다.
우리는 흔히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해서, 눈맞춤이 무조건 바람직하다고만 생각하기 쉬운데, 정작 뇌는 이 과정을 꽤 버거워하고 있었던 셈이다.
10분 넘게 눈을 마주보면 생길 수 있는 일
여기서 끝나면 그저 “대화할 때 눈을 적당히 피하자” 정도의 결론이 나올 텐데, 사실 비슷한 맥락의 연구가 더 있다.
2015년, 이탈리아의 심리학자 조반니 카푸토(Giovanni Caputo)는 피험자들에게 다른 사람의 눈을 10분 동안 바라보도록 했다. 결과가 조금 충격적이었는데, 일부 피험자들이 괴물, 친척,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모습 같은 이상한 환각을 봤다는 증언이 나왔다. 이유는 “신경 순응(neural adaptation)”이라는 현상과 관련 있다고 한다.
뇌는 계속 똑같은 자극이 들어오면 그 자극에 대한 반응을 서서히 바꾸어버린다. 예를 들면 처음에 책상에 손을 올렸을 때는 “차갑다”든지 “딱딱하다”든지 감각이 선명하게 느껴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 감각이 희미해지는 것과 비슷한 원리다. 카푸토의 실험에서 10분 정도라는 길지 않은 시간이지만, 시선을 한 곳에 계속 고정하면 뇌가 “계속 똑같은 장면이네?”라고 여기고, 시각 정보를 재구성하는 과정에서 기묘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는 설명이다.
교토대학교 연구팀도 이런 신경 순응이 눈맞춤 실험에 어떻게든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언급했다. 짧은 시간에도 시선과 언어를 동시에 처리하다 보면 뇌가 자동으로 자원을 재배분하거나, 혹은 다른 ‘착각’ 상태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눈을 피한다고 무례한 건 아니다
이런 맥락을 알고 나면, 대화 중에 상대가 눈을 피한다고 해서 무조건 예의가 없거나 마음이 다른 데 가 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시선 맞추기 자체가 뇌에 주는 부담이 상당할 수 있고, 상대는 그저 조금 더 편안하게 생각이나 말을 정리하려고 잠깐 눈길을 돌리는 것일 수도 있다.
일부 사람들은 “나는 일부러 눈을 피하는 게 아니다. 시선을 맞추고 있으면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서 말이 안 나온다”라고 털어놓기도 한다. 교토대 연구 결과가 이 말을 과학적으로 뒷받침해준 셈이다. 우리는 그동안 “눈을 안 마주치면 실례”라거나 “상대를 무시하는 것”이라는 통념에 사로잡혀 있던 건 아닐까?
물론 이 연구는 26명이라는 소규모 피험자를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아직은 논란의 여지가 많고, 다른 변수를 통제하는 문제도 꼼꼼히 따져봐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눈맞춤 등)과 언어 처리(말하기, 생각하기 등)가 서로 어떤 상관관계를 갖는가’라는 화두를 던졌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첫걸음으로 여겨진다. 연구팀은 앞으로 더 다양한 상황과 더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실험을 확장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의 성격 차이나 문화적 배경 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도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눈맞춤에 대한 태도는 문화권에 따라 천차만별이라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으니, 후속 연구가 진행된다면 더 풍부한 결론이 나올 가능성이 있다.
대화를 조금 더 편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서로 다른 방식으로 대화를 이어간다. 어떤 사람은 눈을 똑바로 보고 있어야 안정감을 느끼지만, 또 다른 사람은 그게 오히려 긴장감을 키울 수 있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시선을 맞추고 말하는 것”에 부담을 느끼는데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제 이 연구 결과를 통해 “굳이 상대 눈을 계속 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인식이 조금이나마 확산될 수도 있겠다. 다음번에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상대가 슬쩍 시선을 피한다고 해서 “저 사람이 내 말을 대충 듣나?” 하며 의심부터 하기보다는, “아, 지금 저 사람은 생각을 정리하느라 뇌가 바빠졌구나” 하고 가볍게 넘겨도 괜찮다. 어쩌면 그 잠깐의 휴식이 대화를 더 매끄럽게 이어가는 데 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
'TECH & SCIENCE'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눈송이는 왜 모두 '육각형'일까? 세계에서 가장 큰 눈송이는 무엇일까? (0) | 2025.01.09 |
---|---|
자율주행, AI, 스마트홈을 실험하는 2,000명 규모의 토요타의 우븐 시티 (0) | 2025.01.08 |
암흑 에너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없어도 우주가 팽창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는 물리학자 (0) | 2024.12.31 |
시베리아 영구동토층에서 발견된 아기 매머드 '야나', 보존 상태는 역대 최고 수준 (0) | 2024.12.30 |
식물 ‘RNA 언어’를 해독하는 AI 등장! 식량위기 기후변화 해법 되나? (1) | 2024.12.23 |